2008. 2. 10. 600여년의 세월을 버틴 숭례문 역사 속으로 사라지다.

 2008년 2월 10일.
 교과서 속에서 국보 제1호라는 명칭으로 익숙한 숭례문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상징물이기에 cf 속에도 종종 등장하기도 했던 남대문이 이제는 복원을 기다리는 신세가 되어 버린 것이다. 일제의 핍밥 속에서도, 전쟁 속에서도 꿋꿋이 살아 남아 주었기에 더욱 대견했던 것이 국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너무도 어이 없이 불타버렸다. 
 엊그제까지만 해도 숭례문은 서울에 있는 목조 건물 중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었다.  

1900년대 초반의 숭례문의 모습 

 1963년 5월 14일 중수 준공식 때 모습, 1983년 신축중인 고층빌딩들 사이에 싸인 숭례문의 모습 


 + 숭례문에 대해서. 
 조선시대 서울 도성을 둘러싸고 있던 성곽의 8개 문 중 정문이 남쪽에 있다고 해서 '남대문'이라고도 불렸다. 태조 4년(1395)에 짓기 시작해 태조 7년(1398)에 완성됐으며 600여년 동안 몇 차례의 보수를 거쳤다. 지금의 건물은 세종 29년(1447)에 고쳐 지은 것인데 1961∼1963년 해체-수리 됐다. 이후 몇 차례의 소규모 정비공사가 이뤄졌다.
 숭례문은 단순히 도성을 통하는 대문의 구실만 하는 것은 아니었다. 본래 축조 목적이 도성의 화마를 잠재우기 위함이었다.
조선 태조 이성계가 한양 천도를 위해 도성을 정하고 백악을 주산으로 경복궁을 남향으로 안치하려다보니 서울의 조산인 관악산이 정면으로 대치되었다. 속리산에서 수백리를 거슬러온 관악산은 마치 톱날을 거꾸로 세운 것처럼 보였다. 그 모양이 불꽃이 타오르는 형상이라 예로부터 이 산을 불의 산(火山) 또는 화형산(火形山)이라 했다. 풍수가들은 여기서 뿜어져 나오는 강한 화기가 궁성을 범한다고 봤다. 한강물도 관악산의 화기를 막아내기에는 역부족이라고 판단했다. 화기로 부터 도성을 보호할 비기가 절실했다. 그래서 고안한 첫번째 방법이 경복궁의 방향을 트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것도 관악산의 화기를 누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도성에 크고작은 화재가 잇따랐다. 이에 큰 대문을 도성의 정남쪽에 세워 화기와 정면으로 대응토록 했다. 이름도 숭례문(崇禮門)이라고 정했다. 숭례문은 글자 그대로는 '예(禮)를 높이는 문(門)'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숭례문의 예(禮)자는 오행으로 볼때 불(火)에 해당된다. 여기에 '높이다' '가득차다'라는 의미의 '숭(崇)'자와 함게 써서 수직으로 타오르는 불꽃 형상을 이루도록 했다. '불은 불로써 다스린다'는 이화치화(以火治火)의 논리를 적용한 경우다.
 한편 조선시대에는 한양의 성곽이 동쪽의 남산에서 내려와 지금의 힐튼호텔 앞을 지나 숭례문에 연결된 형태였다. 서쪽으로는 서소문으로부터 상공회의소 앞을 지난 성벽이 숭례문에 직접 연결돼 있어 이 성문을 통하지 않으면 도성을 드나들 수 없었다. 그러나 광무 3년(1899) 서울 시내 전차노선 공사와 개통으로 인해 동대문과 서대문이 주변과 함께 헐리며 훼손이 시작됐다. 1907년 일제가 숭례문과 연결된 성곽을 허물고 도로를 내면서 도로에 둘러싸여 고립돼 왔다. 마침내 2005년 5월 숭례문 주변에 광장이 조성됐고, 2006년 3월에는 문이 100년만에 일반에 개방됐다.
 남대문에 걸린 '숭례문(崇禮門)'현판 글씨는 천하 명필 추사 김정희도 탄복했다는 명필이다. 추사가 과천에서 한양으로 내왕할 때면  늘 남대문 앞에 서서 '崇禮門' 현판 석자를 쳐다보며 해 저무는 줄 모르고 감탄했다고 한다. 이수광의 지봉유설에 의하면 숭례문이라는   현판 글씨는 삼봉 정도전이 짓고, 조선 3대 임금인 태종 이방원의 큰아들이자 세자였던 양녕 대군이 썼다고 전해진다.
숭례문은 한양 도성의 다른 대문과는 달리 유독 현판의 글을 세로로 썼다. '공손한 자세를 나타내기 위해 그렇게 했다'고도 하고, '서울 남쪽에 있는 관악산의 화기(火氣)를 누르기 위함'이라는 주장도 있다.     
   숭례문 현판은 한 때 유실 된 적도 있었다. 임진왜란 당시 왜적들이 떼어내 잃어버렸던 것을 남대문 밖의 웅덩이에서 찾았고, 지금껏  편액으로 걸리며 600년 역사와 동고동락해왔다. 

6.25 직후의 숭례문

 + 숭례문에 얽힌 이야기
 조선실록 선조 4서 에서는 임진왜란 보름전 숭례문에 화재가 발생하여, 여러 대신들은 흉조라 하였다고 하는 기록이 있다.
 근대적으로는 한일병합조약 3일전 숭례문의 현판이 떨어져 내렸다는 기록이 있다. 
 6.25 이전에도 이와 같은 사건이 있는데, 6.25가 발생되기 몇 개월 전 숭례문의 좌측 성벽이 무너져 내렸다는 기록도 있다.



 + 그리고...
 1. 국보급 문화재를 굳이 개방해야만 했을까? 
 국가를 상징하는 문화재이다. 굳이 국민들에게 개방을 하는 것이 의미 있는 일이었을까? 남대문의 경우 가까이에서 보는 것보다는 조금은 멀리서 보는 것이 더 나은 문화재이다. 한 눈에 남대문의 웅장함을 볼 수 있으니 말이다. 이런 문화재를 굳이 개방을 해서 위험에 빠트려야만 했을까? 문화재청에서도 극구 만류한 일을 시행해야만 했느냐는 것이다. 설사 개방을 하는 것이 보다 의미있는 일이라 한다면, 왜 관리 하지 않았던 것일까. 도심 한복판에 개방되어 얼마든지 접근할 수 있는 위험에 노출시켜 놓고, 상시 관리하는 관리인조차 없다니. 이 얼마나 무책임한 노릇인가. 개방을 결정하였을 때, 관리에 대한 부분은 논의하지 않았더란 말인가. 

 2. 화재보험에도 가입하지 않은 목조 건축물. 
 복원에만 200억원이 든단다. 지름 90cm이상의 소나무를 국내에서 구할수도 없단다. 이런 건축물이 화재보험조차 가입되어 있지지 않단다. 목조물의 경우, 훼손의 가장 큰 원인이 화재이다. 우리 나라의 경우 대부분의 건축물들이 목조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 건축물에 화재에 대비한 보험에 조차 가입되어 있지 않았다니 얼마나 한심한 노릇인가. 화재가 나면 몇 백년 묵은 소나무가 활활 타오를 것이라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가장 큰 위험에조차 대비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무슨 문화재를 보호한다는 말인가!  2년전 창경궁에 방화로 인한 화재가 있었다. 이를 보고도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였으니, 유구무언 할 밖에... 겨우 9500만원으로 무엇하려고...

 3. 안타까운 마음뿐.. 
 내 생전에 숭례문이 사라질 것이라는 생각은 꿈에도 해 본 적이 없다. 당연히 숭례문은 그 자리에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이런 당연하다는 생각에 고마움을 몰랐던 것일까. 너무 안일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일까. 그저 미안할 뿐이다. 눈 앞에서 불타고 있던 숭례문을 지켜보고 있어야 하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지금까지 소중하게 지켜왔던 선조들에게 죄송할 뿐이다. 앞으로 숭례문을 보지 못할 후손들에게 사죄할 뿐이다. 

4. 잘못된 것은 언제나 남의 탓. 
 화재가 나고, 국민의 여론이 악화되고 있다. 이에 저마다 남의 탓을 하기 바쁘다. 소방당국과 문화재청이 서로 잘못을 미루기에 급급하고, 여당과 야당은 원인 떠넘기기에 급급하다. 누구의 탓이라 꼬집어 말할 수 없다. 우리 모두의 탓이다. 문화재 하나 지켜내지 못하고 있었던, 그 소중함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우리 모두의 탓인 것이다. 언론에서 계속해서 떠들어 대는 남의 탓하기는 이제 듣기도 싫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면 큰 일이라도 나는가? 언제까지 남의 탓이라고 핑계만 대고 있을 것인가.

 + 그 밖의 사진들
 서울의 상징. 대한 민국의 상징 숭례문

화재 속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숭례문 현판
 

by topaz | 2008/02/12 00:31 | 그리고...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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